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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지사지가 위험한 이유: 배려와 환대 -윤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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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운영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638회   작성일Date 22-02-24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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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지사지가 위험한 이유:
    배려와 환대
    진성리더십에서는 세상을 보는 지도를 정신모형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세상을 보고 이해할 때 맨눈으로 보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모형의 지도가 시키는대로 보고 이해한다. 정신모형이라는 자신의 세계관을 통해 타자와 세상을 보는 것이다. 타자에 대해서 아무리 객관적으로 평가하려 해도 자신의 정신모형이라는 거울로 판단한 것이기 때문에 자아와의 동일성을 벗어나기 힘들다. 타자의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인을 자아와 같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정신모형을 강요하는 것이 바로 타인에 대한 전쟁이라고 규정한다.
    우리는 오늘도 자신의 정신모형 속에 갇혀서 타자 혹은 세상과 전쟁을 치루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황금율로 생각하고 있는 역지사지도 레비나스의 입장에서 보면 아래처럼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역지사지란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때 이해된 다른 사람의 고통은 자신 상황에 근거해서 파악한 고통이지 상대가 가진 고통 자체는 아니다. 결국 나와 상태가 같다는 동일성에 근거한 타자의 이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의 노나라 새에 관한 사례는 동일성을 역지사지로 포장할 때 어떤 문제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옛날 바닷새 한 마리가 노(魯)나라 교외에 내려앉았다. 노나라 군주는 이 새를 맞이하여 종묘에서 술을 베풀고 순임금의 음악인 구소를 연주하여 즐겁게 하며, 소·돼지·양을 잡아 대접하였다. 그러자 새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근심에 잠겨 한 점의 고기도 먹지 못하고 한 모금의 술도 마시지 못하다가 삼일 만에 죽고 말았다.
    새가 죽은 이유는 노나라 군주는 자신을 보양하는 동일성의 방식으로 새를 보양했지 새의 입장이 되어서 새를 보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의 고통에 대해서 내가 이해한 바를 역지사지란 이름으로 실행한 것이다. 사례는 자신을 버리고 상대의 고통 속으로 한 번도 들어가 본적이 없는 사람들이 베푸는 역지사지 배려가 위험한 이유를 잘 비유하고 있다. 특히 고통을 당해본 경험이 없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리더들이 역지사지는 노나라의 새를 죽이는 불운을 초래한다.
    고통을 가진 사람들 대부분은 오랫동안 세상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마음의 문을 안으로부터 잠군 사람들이다. 밖에서 아무리 수 많은 열쇠를 시도해봐도 안에서 열어주지 않는다면 이 사람 마음으로 들어가 이들의 고통을 덜어낼 수 없다.
    타자는 내 정신모형에 의한 이해를 벗어나 저만큼 달아나 있다. 타자와 나 사이에는 물리적 거리만큼 절대적 거리가 존재한다. 배려할 수 있다는 우월감으로 자신의 열쇠로 일방적으로 문을 따고 들어가는 행동보다는 상대와 나 사이에 공간을 존중해주는 것에서 상대에 대한 환대가 시작된다.
    진정한 배려와 환대의 첫 단계는 내 정신모형의 동일성으로 상태를 제압하고 포획하는 것을 넘어서 타자와 나 사이의 사회적 거리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상대의 정신모형과 나의 정신모형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상대와 나 사이에 절대적 공간과 거리를 인정하는 것이 환대와 배려의 시작이다. 내 정신모형를 역지사지라는 이름으로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는 것이 환대의 시작이다.
    둘째 단계는 거리를 두고 내 정신모형을 비우고 상대의 정신모형이 이야기하는 고통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이다. 자신 눈에 담긴 들보를 빼고 상대를 상대를 바라보는 단계다. 마음의 문을 조용히 두드려주고 상대가 문을 열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보여가며 자기 고통을 들려주기 위해 나를 초대하는 것을 기다려주는 것이 진정한 환대다.
    마지막 단계는 상대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 같이 상처받을 용기이다. 같이 상처 받을 수 있는 용기가 없다면 진정한 환대는 처음부터 없는 것이다. 상처를 받은 자신과 상대이 존재에 대한 각성으로 서로를 일으켜 세우는 것으로 환대는 마무리된다. 자신과 상대가 아픔을 딛고 일어나 삶의 주인공으로 세워지는 것이 환대의 종착역이다. 우리가 상처를 받아 누워 있음에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만드는 이유를 각성해서 서로를 일으켜 세우는 손을 내미는 단계이다. 아픔 사람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삶의 존재목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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